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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식/해외

1일차 중국답사여행 대련-여순>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도시, 대련

북중접경지역 4박5일>

1일차 대련(다이렌)-여순(뤼순)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도시, 대련"

 

조중접경지역을 가다

인천에서 대련은 비행기로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국은 대한민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편 중국은 정말 넓고 넓었다. 우리는 여행기간 내내 '대륙'이라는 단어를 달고 살았다.

대련공항에서 만난 현지가이드가 처음 건넨 말도 "백두산 여행은 일명 '엉덩이 여행'이니 장거리 이동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앞집에 잠깐 간다고 말하면 2시간이라면서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달래곤 했다. 덕분에 이동시간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었다.

실제로 4박 5일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1500km, 총 35시간을 이동하였다. 짧은 기간동안 바쁜 일정, 많이 본다고 많은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시민단체에게 주어진 큰 기회였기에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자 욕심을 부렸다.

4박 5일 동안 답사여행을 하게 될 요녕성(라오닝성), 길림성(지린성),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은 한반도 면적의 3배가 넘는다. 요령성은 대한민국보다 크다.



동북 3성의 총면적은 79만㎢(중국 전체의 8.2%)이다. 한반도는 22만㎢(남한 10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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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한 대련은 요녕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북방의 홍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관광 도시이다. 동시에 1년 내내 해면이 얼지 않는 항구 덕에 동북지방의 경제중심지로 세계에서 살기 좋은 100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이 지역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 수난의 현장이다. 대련은 청일전쟁 이후 (1894년~1885년) 러시아의 관리하에 있었다. 대륙 진출의 꿈을 키우고 있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러시아가 주둔하고 있던 여순항을 기습공격한다. 러시아로부터 대련과 여순을 빼앗은 일본은 남만주철도까지 접수하고 관동군을 주둔시킨다. 대련-여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야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대련 시내에는 그 당시 건물이나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러시아와 일본이 연달아 지배하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짧은 일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대련시내는 둘러보지 못하고 바로 203고지로 향했다.


#1. 러일전쟁 203고지

우리는 러일전쟁의 최대격전지 203고지에 도착하고서도 왜 이곳을 굳이 왔는지, 왜 여기가 시작점인지 잘 알지 못하는 어수룩함을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 조선과 만주의 지배를 확정짓기 위해 벌인 또 한번의 싸움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203고지의 전투는 러일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그리고 조선과 만주의 운명도 결정지었다. 일제는 제국주의로서의 침략야욕과 잔인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중국 땅에서 벌어졌다.

일본은 승리를 기념하고 여순전투에서 희생한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령산(얼령)탑을 세웠다. 전투에서 승리자인 일본은 1만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러시아는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참 이상한 전투이다. 승리자가 더 많은 피해자를 내다니.

러일전쟁 최대격전진 203고지

여순일대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203고지에 서니 여순항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중요한 전략지'라는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를 상기하자니 중국에게는 얼마나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운 역사일까 생각해본다.

이령산탑 근처에 '명기역사 물망국치(銘記歷史 勿忘國恥)'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역사를 마음에 새겨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역사는 나라와 민족이 나아가는 또 다른 힘이다.

일본이 조선식민지배의 교두보가 된 러일전쟁을 정작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종종 '대한민국은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과거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역사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만날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는 그날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새기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백옥산 관광풍치지구 안에 있는 백온산 탑, 이곳은 대련 10대 풍치중 하나이다.

 

#2. 여순감옥에서 만난 민족독립투사

대련시내에서 1시간정도 이동하면 여순감옥을 만난다.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이 수감되었다가 생을 마감한 곳으로 한국인에게도 유명하다. 다른 나라 땅에서 조선의 독립투사를 만난다는 것은 왠지 긴장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들여놓는데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거대한 벽돌건물이었다.

여순감옥 전경. 현장교육을 나온 군관학교 학생들

회색벽돌은 러시아, 붉은 벽돌은 일본이 지은 것이다.

건물 한 벽면전체가 1층은 회색벽돌로, 2층 이상은 붉은색벽돌로 지어져있었다. 1902년 러시아가 짓던 건물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증축한 흔적이다.

여순감옥은 동북지역에서 최대 규모이다. 250여개가 넘는 감방, 한 번에 200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연간 수감자는 2만 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죄수는 대부분 정치범 사상범으로 분류되는 항일독립투사들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이 많이 투옥되었다.

감옥에 들어서면 죄수들의 신체검사를 방이다. 죄수복을 걸어 놓는 곳, 핏물이 스며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죄수복은 섬뜩했다.

요목조목 전시되어 있는 물품들에 감탄하면서 수색실, 수감실, 고문실을 둘러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사형장이 가장 충격이었다. 우선 사형시킨 시신을 손도 대지 않고 나무통에 넣어 나무통 채로 쌓아놓는 일제의 잔악함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중국의 적나라함에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3년 동안 약 700여명의 항일투사가 사형을 당했다는데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숨을 거뒀을 생각을 하니 섬뜩하고 서러웠다.

대련과 여순 곳곳에 일본이 세워놓은 신사나 말뚝들을 뽑아다가 따로 전시해둔 관이 있다.

관동군의 만행과 일제가 지은 신사의 돌들,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표적인 독립지사 안중근도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단죄한 후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됐다.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은 안중근 기념관

여순감옥 내에는 국제항일 열사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많은 조선독립투사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중 안중근의사의 활동과 기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주은래 총리(1898~1976)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중조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_ 주은래

최근 안중근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국내에서도 많이 있었지만 중국에 와서 독립 운동가들의 기록을 만나니 부끄러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생겼다. 그의 나이 31살에 중국 땅에서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쓰다 생을 마감하였다는 사실은 꽤 오래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안중근 의사의 뤼순감옥에서 남긴 유언

주은래 총리는 안중근의사의 저격활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안중근 동상이 있는 이 곳, 조선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모두 묵념을 한단다. 우리는 한참 쳐다보고 지나칠뻔 했는데 화교출신의 가이드가 말해주었다.

 

다음으로 들른곳은 여순관동 법원

일본은 관동도독부를 설립하고 그 산하에 법원 감옥 통신고나리 병원 학교 등 식민기관을 설치하였다. 우리가 들른 관동법원은 항일투사를 비롯한 중국과 조선 러시아 등 국가 국민들을 판결하던 곳이다.

안중근의사와 신채호선생 등도 이곳에서 판결을 받았다.

판결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자비한 고문기구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안중근의사가 판결을 받던 장소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에 앞서 오키나와도 지배했다.

일본과 같은 색인 조선, 완전한 식민지를 뜻한다.

여순감옥은 한눈에 보기에도 '관광지'로 보일만큼 잘 마련되어 있었다. 동북지역 최대 규모의 감옥이라더니 꼼꼼히 돌아보자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여순감옥만 돌아봐도 일제의 식민지 중국으로서의 수난의 역사를 잘 알 수 있도록 기획되어 있었다.

얼마 전 다녀온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떠올랐다. 전시관도 기념관도 아닌 애매한 모습을 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보면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반면 중국정부는 여순감옥을 71년에 복원하여 전시관으로 개방을 했으며 88년부터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이곳을 매우 의미있게 생각하는구나' 라고 혼잣말을 할 때 중국군관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하고 있었다. 낯선 장면이었지만 왠지 부러웠다.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기억하려는 후대를 위해 러일전쟁의 203고지나 여순감옥과 같은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보다 강력한 기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첫날의 답사는 남은 3박4일의 여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여행의 설렘은 어느새 답사여행다운 진지함과 숙연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