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깃털보다 가벼웠던 대한제국의 존재감
덕수궁 미술관 2013. 1.10
작지만 눈여겨볼만한 기획전이 자주 열리는 덕수궁 미술관, 겨울휴가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찾았다.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전시회를 갈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꿩 대신 닭'잡으러 간 것 일지도..
깃털보다 가벼웠던 대한제국의 존재감
나의 인식에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제국’이자 능력없는 ‘황실’이었다. 스스로를 대한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일본과 서양제국주의들이 조선에 압력을 가할 때 무얼 했던가? 조선민족은 커녕 자신을 지키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배일친러를 했다는 이유로 시해를 당하고, 고종은 왕복을 벗어던지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갔다. 이 사건들은 청에서 일본, 일본에 이어 러시아까지 내정간섭을 불러들인 형국이 되었다.
조선민중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불태웠고 '대한제국'은 이를 해결해야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황실'의 능력은능력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는 정도였다. 그들은 문제해결은 커녕 자주독립을 아예 망쳐버렸다.
그런 나에게 ‘황실의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건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전시회는 황실내의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전시회는 적어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참함과 침울함을 한껏 느낄수 있다. 해설을 꼭 챙겨듣는 나의 습관 덕에 인상깊은 전시회가 되었다.
1. 태극기와 일장기들 들고 전국순회를 하는 순종 2. 대표적 친일인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영친왕 3.(좌)대원수복과 원수복을 착용한 고종과 순종 4.(중)스승 이토히로부미와 영친왕 5.(우)소다케유키와 정략결혼하는 덕혜옹주
사진을 좋아한 고종, 일제 선전물이 된 순종의 사진
이 기획전은 대한제국을 자주독립과 근대화라는 이중과제를 짊어진 전환기이자 정치적 격변기로 규정하고, 격동기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한 황실 인물들의 삶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1부. 대한제국의 탄생에서 한일강제병합까지 (1880-1910), 2부.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1910-1989) 로 구성되어 있다. 고종은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다. 19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서양문물에 대해 개방적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사진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 대한제국과 자신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사진을 외교적,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대부분 서양인들이 촬영한 것이다.
고종의 사진은 가끔 서양잡지나 신문에 실리곤 했는데 을사늑약이후에 그의 사진에는 '망국의 왕'이라는 타이틀이 걸리게 된다. 그래서일까? 순종은 사진찍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각종 행사사진에 순종의 얼굴은 빠지지 않는다. 이토히로부미는 전국순회와 같은 정치적 이벤트를 기획하고 순종을 앞세웠다. 순종이 통감부와 친하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서 을사늑약과 한일 강제합병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순종의 사진에는 종종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이 등장한다.
일제식민지배를 받는 비운의 '고종일가'
고종의 장례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식으로 치뤘다.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서양식으로 옷을 입어야만 했다. 조선인의 정서적 반발은 컸고 장례식에 참석한 조선인은 70명 뿐이었다. 순종은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수 없어 결국 마지막날에 참석한다.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이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간다. 그의 스승은 이토히로부미이다. 영친왕은 이토히로부미가 살해되고 나서야 민족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일본장교까지 지낸다.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일본인과 결혼할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황실사람이 같은 조선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종의 자녀들 그의 손자들 역시 대부분 일본인과 결혼했다. 그 가운데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한 이우(의천왕의 아들)도 있다.
고종일가는 이승만의 '황실해체, 황실재산몰수' 정책으로 고국으로부터 거부당하다가 60년대가 지나서야 하나둘씩 귀국할수 있었다. 살아서 귀국한 이들은 너무 늙어버렸거나 병들었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가 창덕궁 낙선재나 자택에서 세상을 마감했다.
***
일본식민지배를 막지 못한 고종일가는 비운과 비참 그 자체이다.
민족의 수난을 막지 못한 이들에게 어떠한 '보상'이 있었다면 분노했겠지만, 황실일가조차 보호받지 못한 일제시대라고 생각하니 조선민중의 비참함은 오죽했겠는가 싶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덕수궁을 걸어나오는데 입구에 적혀있는 덕수궁의 설명이 왠지 힘겹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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