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_ 서경식 (창비 2002.02)
남들이 TV를 보듯이 나는 그림을 본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식견이나 지식이 전혀 없다. 다른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나는 남들이 TV를 보듯이 그림을 볼 뿐이다. TV보는데 사전준비는 필요하지 않다. 작품, 작가에 대한 배경을 알게되면 더 흥미롭고 새로운 기분이 들지만, 지식이 쌓이지 않아도 아쉽지는 않다. 현실은 잠시 잊고, 웃고 싶어서, 쉬고 싶어서 본다. 자기코드에 맞는 프로그램을 챙겨볼 뿐이다. 나는 그런 기준으로 전시회를 선택한다. 다만 해설이 있다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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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서경식선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책을 읽었다. 다른 미술책과는 매우 다르다. 보통 작품의 배경이 있고 작가의 정보가 있으며 저자의 느낌이 있다.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완결된 구조를 가진다. 이런 책들은 미술초보자들에게는 더없이 친절한 글이다. 그림해설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나면 그림을 기억하기보다는 해설내용을 외우고 싶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서경식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몇 장 읽고나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두서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너무 개인적인 에세이가 아닐까' 하는. 작품의 해설이 전혀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의 상황, 정서, 고민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읽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백십여곳 이상의 미술관-박물관을 다녔다니 수많은 작품을 보았을텐데도 30대에 만난 그림들을 주로 언급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럽고 격정적인 고민에 휩싸였을때 만난 작품들이라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으리라.
그는 재일조선인 2세이다. 고국(당시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뒤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아버지는 귀국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가 태어났다. 두 형은 분단된 고국(남한)에 유학을 갔다가 군사독재정권의 감옥속에서 17년 19년을 보낸다. 양친은 옥중의 형들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서경식의 나이는 서른즈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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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림에 대한 정보를 얻을 때와는 다른 자극과 충격이 남았다. 서경식 선생이 그림을 만나는 방식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선이 좋았다. 어렴풋이나마 '나의 방식으로 그림을 읽는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어떤 그림을 만났을때 '찌릿'하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이야말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이니 종교니 하는 인문학도 무슨파니 무슨파니 하는 미술계 흐름을 배우는데 집중하다가 그림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과 정서를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위대한 작품'을 놓칠수도 있으니까. 이런 맹랑한 가능성과 자신감을 준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 그림을 TV보듯이 하는 나의 태도는 당분간 더 당당해질것 같다.
"인상파 아니면 해가 뜨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본에서는, 그 적방인 보나 같은 화가를 누가 쳐다보기나 할 것인가. 하지만 그바로 거기에서 나는, 평가나 명성이 정해진 것만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며 만족해하는, 뒤집어놓은 공식주의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결국 싸움의 승패가 판가름난 뒤에야 승자 편에 가붙는 꼴이 아니고 뭔가. 그것은 변화나 진보를 긍정하는 정신하고는 인연이 없다. 변화나 진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변학하고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서의 전통이나 보수를 시대적 조건의 문맥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_ 본문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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