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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식/국내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의 신화_동학농민혁명

120년만의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을 찾다.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의 신화

   

 

 

120년만의 갑오년이라고, 우리가 정읍을 찾은 건 2014년 2월 8일, 음력으로 1월 9일이었다.

“춥지요? 이렇게 추운날, 얇은 저고리 하나입고 농민들을 일어났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정읍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 이갑상 이사장님께서 동학농민혁명을 소개하는 첫마디였다.

 

1894년 음력 1월 10일, 고부군(당시는 고부군 정읍면. 현재에는 정읍시 고부면이다)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그해 11월 말까지 이어지면서 1 여년을 지속해갔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역사의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으로 알려져있으며, 프랑스 시민혁명, 독일 농민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세계 4대 근대 민중혁명으로 일컬어 진다.

 

무명동학농민위령탑

 

 무명동학농민위령탑 앞에 서있는 이갑상 이사장님

동학혁명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등 주요 지도자들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그 못지 않게 기억되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무명의 농민대중들이다. 당시 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누구는 300만이라고 하고, 누구는 죽거나 다친 사람이 30만이라고 한다. 당시 무장한 세력만도 1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읍에는 이들을 위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4년에 건립된 무명동학농민위령탑이 있다.

굶주림과 부패에 낫을 들고 살길을 찾아나선 사람들, ‘사람이 하늘이다’는 사상에 몸과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하고 강한 외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는 격문에 정의와 분노가 불타올랐던 사람들....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한명한명 상상하며 묵념을 드린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비까지 내려서인지 스산했고, 그냥 지나쳐도 모를것 같은 평범한 언덕에 가까웠다. 다 오르고 나서야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20여명의 동학신도들은 사발통문을 돌렸고 백산에 모여든 농민들은 군대가 되었다. 부대를 편성하고 농민군 행동강령을 만들고 격문을 썼다. 당시 심미산이었으나,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이 빼곡하게 보여 죽산이요, 일어서면 흰옷이 촘촘해 백산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야트막하지만 야산하나를 뒤엎어버릴만한 규모와 결기가 있었다.

"우리가 의(義)을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효수형, 시신도 없어라_전봉준 고택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일한 흔적이 있는 곳이다. 몰락한 양반으로 마을 훈장전생을 하던 그는 동학을 만나 접주가 되었다.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12월쯤 그는 밀고에 의해 일본군에게 붙잡혔고 '효수형'을 당했다. 일본은 전봉준을 살려서 조선침략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 하였지만 이를 간파하고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두 눈을 부릅뜬 전봉준의 머리는 읍내에 걸렸고, 그는 역적의 죄를 받았다. 그의 시신을 용기있게 가져올 수 있는 이는 이미 혁명과정에 죽었거나, 각지에 흩어져 숨어있었다. 전봉준은 시신없이 가묘를 쓰고 있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 (除暴救民), 척양척왜(斥倭洋倡義)

동학 민란이 아니라 갑오년의 혁명

동학은 혁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봉준은 고부군 군수 조병갑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저수지를 만들어 물값을 받고,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았고,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운다고 돈을 걷었다. 격분한 농민들은 궐기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안으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자 했고, 밖으로는 청일과 싸웠다.

조선왕조의 무능은 청나라 군대에게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천하에 드러났다.  일본군대는 청나라 군대를 빌미로 조선에 상륙했고, 민비를 몰아내고 친일내각을 구성해버렸다. 동학군은 차후에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모두 살육을 목표로 했다. 1894년 11월~3월 사이에 학살된 농민군만 해도 최소 3만~5만에 이른다.  일본은 동학을 진압하고 나서 청일전쟁을 거쳐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지배하게 된다.

동학군이 대승하자 일본은 4천명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우금치에서의 패배, 혁명의 좌절

동학농민혁명 최대 격전지이자 농민군 최후의 보루였던 공주 우금치, 현재 모습에서는 좀처럼 당시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기념관에서 옛 우금치 사진을 보고서야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이 자리에서 죽었겠으며, 이 고개를 넘지 못해 한양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통탄해 하며 눈물을 흘렸을까 싶었다.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대규모 연합부대를 이끌고 진두지휘하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농민군은 사정거리 100보인 총을 들고 심지에 불을 붙여 사격을 했는데, 일본군대는 사정거리는 4~500보 이상인 총을 들고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제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이나 관군보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 무기도 보잘것 없는 농민군은 결국 시체가 되어 온 산을 가득 채웠다.

우금치전투에서 패배는 혁명의 기운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동학농민군의 혁명은 전봉준 김개남이 채포되면서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동학, 농민, 그들의 새세상

거문도 농부. 손에 낫을 들고 보리 농작물을 지고 있는 전통적인 농부 복장을 하고 있다.

'인내천' 사상이 빠르게 전파하면서 멸시와 모멸이 없고 인간의 귀천이 따로 없는 현실을 주장하는 동학사상, 노비를 딸로 삼아주고, 서자도 세상의 중심이 될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 설레였을까. 아마 자신들이 살아생전 만날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새세상을 보있을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1895년에 그치지 않고 이후 의병활동과 3.1운동으로 다시 살아난 것도 이 힘이 있었으니 가능했으리.

 체포된 전봉준 대장. 1895년 3월 30일(음) 41세로 교수형을 당했다. 사진은 처형 보름전에 찍었다.

120년만의 갑오년,

지금은 신분사회도 아닌데 계급 양극화는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이 친일 내각을 앞세워 조선을 삼켰는데, 아직도 친일파가 일제강점기가 근대화를 만들어냈다고 찬양한다.

우리는 무엇에 가슴설레여 하며 새세상을 꿈꿀수 있을까?